> ghostbow_II

Sound-Text Archive. 


004.


  새의 알의 색깔은 새벽의 햇빛을 생각나게 했다. 새의 날개는 말처럼 하늘을 달리는 구름의 무리를 생각나게 했다. 어두운 밤과 같은 색깔을 하고 있는 고사리는 참으로 신선해서 라니는 그 잎 속에 자신의 불행한 얼굴을 파묻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새가 죽어도 날개의 빛은 살아 있을 때와 같으며 결코 썩는 일도 없었다. 라니는 날개를 좋아했는데 그것이 자존심과 희망을 계속 지켜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라니는 날개의 각질로 된 얇은 관과 그 깃털 속에 어떤 메시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 그에 맞는 단어를 마음 속으로 찾아보았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자기 앞에 이런 사소한 것들을 늘어놓아 보기도 했다. 희귀한 나뭇잎과 빛나는 돌들을 트럼프 점을 치는 사람처럼 늘어놓았던 것이다. 때로는 혼자 말을 하기도 했다. “그래 바로 이런거야. 이걸 찾고 있었던 거야.”
  또 어떤 때는 사물들의 색과 형태에 아직도 집착하는 자신의 비참함이 싫어져서 문도, 창도 없는 넓디넓은 숲의 한복판에서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마치 곧 사라져버릴 것 같은, 해독이 어려운 고문서를 어떻게든 읽으려고 하는 것처럼 하늘을 보았다. ‘아직 시간은 충분히 많으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어.’라고 라니는 생각했다.
  깊은 어둠의 저편에 있는 저 하늘까지 고양이의 작은 울음소리와 나무 사이를 떠도는 인간의 심장의 고동소리가 과연 들릴까. 하늘 높은 곳에서는 어떻게 나아갈 방향을 알 수가 있을까. 전후 좌우도 없고 그저 깊이만이 있는 그 공간에서 말이다. 현기증이 나는 것 외에는 어떤 안내도, 어떤 근거지도 없는 그 공간에서.
  라니는 하늘의 돌맹이와 땅의 돌맹이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한 것일까? 왜 자신의 배를 갈라서라도, 몸에 숨겨진 것을 찾아서라도, 대답을 찾으려 한 것일까?
  “언젠가는 좀 나은 얼굴로 돌아오겠지.”
  그렇다. 결국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이런 사소한 것이었다. 왜 이런 것을 좀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하고 자신도 놀랐다. 변해버린 얼굴을 하도 자주 만지다보니 이제는 손의 감촉만으로도 잘 알게 되었는데 말이다.
  라니는 뱀을 좋아하게 되었다. 여러 겹으로 또아리를 트는 뱀은 자신 외에는 누구에도 신경쓰지 않으며 입 속에는 언제나 죽음의 각오를 숨기고 있다.

쥘 쉬페르비엘, 「라니」



005.


  나를 계속 내적으로 추동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런 생각이다.
  두개골의 봉합선은 소리를 저장하기 위해 회전하는 실린더에 포노그래프 바늘이 새겨 넣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선과(검토해봐야겠지만 일단 가정하자면) 유사하다. 그렇다면 소리를 시각적으로 번역한 것에서 나온 흔적이 아니라, 그 자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예를 들어 두개골의 봉합선 같은 것- 에 이 바늘을 올려놓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어떤 소리가 생겨날 것이다. 일련의 음들, 어떤 음악이······
  어떤 감정일까? 불신, 공포, 경외, 이 가능한 감정들 중 어떤 것이 이렇게 해서 세상에 출현하게 될 근원-소음Ur-Geräusch에 이름을 붙이는 걸 주저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 질문은 제쳐둔다 하더라도, 어딘가에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종류의 선들을 바늘 아래 밀어 넣어 한번 실험해보고 싶지 않은가? 이렇게 변환됨으로써 다른 감각 영역으로 스며들어간 그것을 느끼기 위해 이런 식으로 윤곽을 끝까지 쫓아가보는 것은 어떤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근원-소음 UR-GERÄUSCH」 (1919)


  표본화되어 진열된 뼈대 중에서 릴케를 매료시켰던 것은 두개골이라 불리는 “가장 외적인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좁은 봉합 속에 있지만 경계없이 활동하는 최고의 과감함[두뇌]을 굳건히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릴케가 며칠이나 파리의 밤을 함께 보냈던 두개골은, 뇌생리학적으로 용기container에 다름 아니다. 이를 “세속적인 공간을 향해서는 철저하게 닫혀 있는 이 특별한 용기”라 부른 릴케는, 중추신경 체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자신의 신체는 외부 세계”에 다름 아니라는 생리학적 통찰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신생아의 두개골에서는 벌어져 있는 틈이 -릴케가 사용한 엄밀한 해부학적 용어에 따르자면- 나중에 전두골과 두정골로 합쳐져 자라나게 되는 곳에 어떤 흔적, 길, 흠이 남는다. 엑스너와 프로이트가 말하는 궤도가 두뇌에서 두뇌의 용기로 투사라도 된듯,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의 눈으로도 이 봉합선에서 실재의 문자를 볼 수 있다. 귀요와 히르트 이래 뇌생리학자들은 두뇌의 궤도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에디슨의 포노그래프를 떠올렸다. 따라서 기술에 밝은 작가가 그들의 뒤를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릴케는 과학자들의 과감함을 일거에 뛰어넘는 결론으로까지 나아간다. 릴케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 암호화한 적이 없는 궤도를 해독하자고 제안한 일이 없었다.



  관상 봉합선을 재생시킬 때 흘러나오게 될 것, 이 이름 없는 근원-소음, 악보 없는 음악은 그 두개골이 망자를 불러내는 의식에 사용되는 것보다 더 기괴한 일이 되리라. 해부학적으로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소리가 된다. 절연재 셸락도 칠하지 않은 포노그래프 바늘이 산출해내는 음은 “소리를 시각적으로 번역한 것에서 나온”것이 아닌, 그래서 절대적 전환 혹은 메타포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고유한 매체인 문자와 정확히 맞서는 대립물, 곧 백색 소음을 얻게 된다. 백색소음은 어떤 문자로도 저장할 수 없다. 데이터를 물리적 채널을 통해 전달하는 기술적 매체에는 원리적으로 소음이 동반된다. 그 소음은 영화에서 초점이 어긋난 화면이나 그라모폰 바늘 소음처럼 신호와 소음의 비율을 결정짓는다. 아른하임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모상을 산출해내기 위한 대가인 동시에 모상 산출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소음은 매체들이 통과해야만 하는 채널들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006.


  언젠가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만 어떤 시간이 흘러도 필요하지 않거나 바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은닉이나 유예조차 불필요할 만큼 완벽한 무지를 유지할 것이다. 이 세계에는 마치 그런 것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무지로써 불완전한 완전을 획득할 것이다. 이곳 아닌 세계에서의 불완전은 이곳에서의 완전이다.

최영건, 「수초 수조」